백암 박은식
(사)임시정부대통령 백암 박은식선생 기념사업회
백암의 독립운동
국혼
백암 박은식은 일제에 의해 조국이 망국의 아픔을 당하자 국혼(國魂)의 불멸(不滅)을 주장하며 망명의 길을 떠났다.
박은식은 한 나라는 국혼과 국백(國魄)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국혼은 국교(國敎) · 국학(國學) · 국어(國語) · 국문(國文) · 국사(國史)로 민족의 종교 · 학문 · 언어 · 문자 및 문학과 역사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국백은 화폐경제 · 군대군사(軍隊軍事) · 영토성지(領土城池) · 함선교통(艦船交通) · 기계기술(機械技術) 등으로 경제 · 군사 · 영토 · 과학 · 기술 등이 그 구성요소가 된다.
박은식은 독립된 나라란 국혼과 국백이 하나로 융합되어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이민족에게 나라가 정복당해 멸망하면 국혼과 국백은 분리된다고 했다. 그런데 망국을 당하면 정복국가에게 국백은 빼앗기지만, 국혼은 소멸되지 않고 존속한다고 했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했다는 것은 국백이 일본에게 정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국혼이 소멸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박은식은 민족이 절망하지 말고 국혼을 유지 강화시켜 조국 광복운동을 벌여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종래에는 일제로부터 국백을 되찾아다가 국혼에 융합시켜 독립된 나라를 다시 만들어야 함을 주장했다.
박은식은 특히 국혼의 가장 중요한 소재처를 ‘국사’라 인식해, 경술국치 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역사서술에 노력했다.
망명(1911. 5)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나라가 망하자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5월 만주 서간도(西間島) 환인현(桓仁縣) 횡도천(橫道川)으로 망명했다.
박은식은 1911년 4월, 부인 차(車)씨가 작고하자 장례를 치른 후 같은 해 5월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후에 대종교(大倧敎) 3세 교주가 되는 시교사(施敎師) 윤세복(尹世復)을 만나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윤세복의 집에 머무르며 국혼(國魂)을 일으키기 위한 일환으로 민족발달사의 연원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같이 하여 저술된 책이 『동명성왕실기』를 비롯해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명임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志)』, 『몽배금태조전(夢拜金太祖)』, 『단조사고(檀祖事攷)』등이다.
동제사(同濟社)
백암 박은식은 이 단체의 총재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1912년 7월 4일 박은식이 신규식(申圭植) · 홍명희(洪命憙) 등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다. 참여자 모두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정신을 새겨 조국 독립을 이룩하자는 의미에서 단체의 이름을 만들었으며, 재상해한인공제회(在上海韓人共濟會)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총재에는 박은식, 이사장에는 신규식이 추대되었고, 김규식(金奎植) · 신채호(申采浩) · 홍명희(洪命熹) · 조소앙(趙素昻) · 문일평(文一平) · 박찬익(朴贊翊) · 조성환(曺成煥) · 신건식(申健植) · 김용호(金容鎬) · 신철(申澈) · 민제호(閔濟鎬) · 김갑(金甲) · 정환범(鄭桓範) · 김용준(金容俊) · 민충식(閔忠植) · 이찬영(李贊永) · 김영무(金永武) · 이광(李光) · 신석우(申錫雨) · 한진산(韓震山) · 김승(金昇) · 김덕(金德) · 변영만(卞榮晩) · 윤보선(尹潽善) · 민병호(閔丙鎬) 등이 주요 간부 및 회워으로 활동했다. 회원은 3백여 명에 달했으며, 상하이의 본부 이외 베이징(北京) · 톈진(天津) · 만주(滿洲) 등의 중국지역과 미국 · 유럽 및 일본에 지사를 설치했다. 동제사 이외 별도로 1912년 말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만들어 송교인(宋敎仁) · 진기미(陳其美) · 당소의(唐紹儀) · 호한민(胡漢民) · 진과부(陳果夫) 등 중국인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목적은 한국독립운동에 이들 중국 혁명가들의 힘을 지원받기 위함이었다.
이 단체는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명덕리(明德里)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한인 2세들을 애국심이 충만한 인재들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박달학원 졸업생들을 중국의 보정(保定)군관학교 · 천진(天津)군수학교 · 남경(南京)해군학교 · 광동(廣東)강무당 등의 군사학교에 보내 독립운동의 인재로 양성했다.
1917년 8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이 대회에 한국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자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으로 단체명을 바꿨다. 하지만 대회가 개최되지 않자 단명을 환원해 사용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으며, 1922년 중반까지 단체가 유지되며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백암 박은식은 이 단체의 감독에 선임되었으며, 취지서를 쓰고 규칙을 만들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박은식을 비롯해 이상설(李相卨) · 신규식(申圭植) · 유동열(柳東說)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다.
신한혁명당 단원들은 세계 1차 대전 후 국제정세가 개편되어 중국과 독일이 손을 잡고 일본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한국 민족운동가들도 일본과 대적할 중국과 독일의 편에 서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 같은 목표 하에 제정(帝政)체제의 정치구조를 가진 중국 및 독일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신한청년당의 조직도 전제주의 구조로 만들었다.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본부장 이상설, 감독 박은식,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李春日), 상하이지부장 신규식, 창춘(長春)지부장 이동휘(李東輝) 등이었다. 본부는 베이징(北京)에 두고, 중국의 상하이 · 한커우(漢口) · 펑톈(奉天, 현 심양[瀋陽]) · 창춘 · 안둥현(安東縣) · 옌지(延吉) 등과 국내의 서울 · 원산 · 평양 · 회령 · 나남 등에 지부(支部)를 설치했다.
신한혁명당의 간부들은 성립 초기 안봉선(安奉線) 철도 파괴와 중국과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한다는 구체적 활동방침으로 세웠다. 즉 중일이 전쟁을 할 경우 일본의 보급로가 될 안둥(현 단둥시[丹東市])에서 펑톈까지 연결된 안봉선을 파괴하는 것과 중국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국가간 조약을 체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실권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안봉선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 들어 간 21개조약을 일제와 체결함으로서 철도파괴는 어려워졌고, 고종의 밀명을 받고자 서울에 잠입했던 단원이 일제에 피체됨으로서 조약체결도 어렵게 되었다.
이 같은 방침이 무산된 후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1915)
박은식은 이 단체의 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했다.
대동보국단은 박은식이 신규식(申圭植)과 힘을 합해 1915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립한 단체였다. 이 단체의 본부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明德里)에 설치되었다. 대동보국단은 이 단체 이전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지자 다른 활로를 모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시베리아와 간도지방 및 국내에서 단원을 확보해 폭넓은 독립운동을 수행하고자 했다. 성립 초부터 단장에 추대된 박은식은 나날이 변해가는 국제질서를 주시하며 이 단체를 이끌어 갔다.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 발표(1917. 7)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대동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창한 선언서이다.
박은식을 비롯한 신채호(申采浩) · 신규식(申圭植) · 조소앙(趙素昻) · 한진(韓震) · 박용만(朴容萬) · 윤세복(尹世復) · 조성환(曺成煥) 등 독립운동계 지도자 14명이 서명해 발표한 선언문이다. 이 선언문은 민족이 대동단결해야 할 필요성, 일제 지배하에 있는 국내의 참상, 해외동지의 역할, 국제환경, 제의(提議)의 강령, 제의에 대한 답장 관계 및 발기인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언은 광무황제가 왕권을 포기하고 국권을 일제에게 내주었으므로 이제부터 왕권의 행사와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고 천명하였다. 따라서 해외 각지에 현존하는 여러 단체들이 단합하고 통일해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의 조직, 즉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창했다.
독립운동계 지도자들이 이 같은 선언을 하자 일제는 크게 긴장해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들 지도자들의 활동지로 밀정을 파견해 동정을 철저히 감시하고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의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이 있고 약 1년 8개월 후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선언서(大宣言書)」 작성(1919. 3. 17)
박은식은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의회가 선포한 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 난 소식을 접한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그 시작을 알리는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박은식에게 부탁했다. 박은식이 한문으로 기초한 이 선언서는 강한택(姜漢澤)과 김만겸(金萬謙)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단행했다. 이 날을 시작으로 러시아에서는 니콜리스크에서는 물론 한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을 만방에 선포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 참여
백암 박은식은 이 단체의 고문에 추대되어 「노인단 취지서」를 쓰고, 「독립요구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에 보냈다.
1919년 3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다. 단장은 김치보(金致甫)였으며, 46세 이상의 한인 남녀노인들이 단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성립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수천 명의 단원이 확보되었다. 이 단체에서 1919년 9월 미국에 체류중인 서재필(徐載弼)에게 총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과 함께 보낸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에는 2,005명의 단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단체가 벌인 대표적 활동은 단원 강우규(姜宇奎)가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있다. 강우규의 폭탄은 총독을 처단하지는 못했으나 수십 명의 일제 고관에게 중경상을 입혀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쾌거였다. 또한 단원 이발(李發)은 동지들과 함께 3·1운동 당시 서울로 들어 와 종각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활동을 벌였다.
한성정부(漢城政府) 평정관(評政官)에 선임(1919.4)
박은식은 서울에 조직된 이 임시정부의 평정관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한성정부는 1919년 4월 23일 홍면회(洪冕喜, 일명 : 홍진〔洪震〕) · 김사국(金思國) · 한남수(韓南洙) 등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수립한 임시정부였다. 정부의 각료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내무부장 이동녕(李東寧) 등이었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추진된 이 한성정부 수립운동의 소식이 전해져 상하이(上海)에서도 그 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 정부 외에 1919년 3월 21일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라 명명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박은식이 평정관으로 활동한 이 한성정부와 상하이의 임정 및 연해주 임정 등 세 정부는 1919년 9월 상하이의 임시정부 하나로 통합해 조국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
박은식은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운동 최고기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1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되었다. 국내외 모든 한민족이 만세시위를 벌이며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이자 힘을 얻은 민족운동계 지도자들은 같은 해 4월 11일 독립운동을 영도할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에 청사를 마련한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 기관과 연계하며 항일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새롭게 거점이 필요한 지역에는 연통부(聯通府)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했다. 아울러 미주에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유럽에는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통령중심제로 시작한 임시정부의 정부형태는 이후 내각책임제(국무령〔國務領制〕, 1925), 관리정부형태(국무위원제, 1927), 절충식정부형태(주석제〔主席制〕, 1940년 이후 광복 시 까지)로 정부구조를 변형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상하이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항저후(杭州) · 전장(鎭江) · 창사(長沙) · 광둥(廣東) · 류저우(柳州) · 치장(綦江) 등지로 이동하는 이동시기를 맞다가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해 한국독립운동을 영도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다 광복을 맞았다.
박은식은 이 같은 임시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했다. 1919년 9월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에 수립된 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발표했다. 이어 한 달 후에는 박환(朴桓) 박세충(朴世忠) · 김구(金九) 등과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초창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가 되면서 내부적 갈등에 직면했다. 이에 민족운동계 모든 지도자들이 우려를 표명하며,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 동조해 박은식은 1921년 2월 14일, 원세훈(元世勳) · 김창숙(金昌淑) 등과 베이징(北京)에서 ‘아(我)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 1922년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명예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국내외 민족운동계 대표자 100여 명이 참석해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고 독립운동계를 담합시키기 위해 그해 5월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창조파와 개조파 등 극심한 갈등 구조만 남기고 결렬되고 말았다.
1924년 12월 11일, 박은식은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3일에는 임정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탄핵 받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1924년 4월 10일, 박은식 대통령은 독자노선을 걸은 이승만이 설치한 구미위원부를 폐지하고 임정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결속시키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다. 개정헌법에는 대통령중심제의 정부구조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같은 업무를 주도해 수행한 후, 1925년 7월 7일 ‘대통령고별사’남기고 퇴임하였다.
대동단(大同團)(1920)
박은식은 이 단체 조직에 앞장섰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하고 국내에서 활동을 벌이던 대동단은 1919년 11월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하이(上海)로 망명시키다 일제에 발각되어 조직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에 상하이로 먼저 망명한 김가진은 그 지역의 민족운동가들과 협력해 1920년 3월 대동단을 재건하였다. 이 때 박은식은 대동단의 재건에 적극 힘을 보탰다. 그는 대동단의 이념과 강령에 대동주의를 채택하도록 제시하였다. 하지만 박은식의 노력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은 오랜 기간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