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
(사)임시정부대통령 백암 박은식선생 기념사업회
백암의 언론활동
황성신문(皇城新聞)(1898. 9)
이 신문은 1898년 9월 5일 남궁 억(南宮檍)이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창간하였다. 창간 목적은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를 올리는 것이었다. 국한문 혼용을 사용한다고 했으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여서 한문위주의 신문이라 할 수 있다. 1900년 1월 5일자부터는 외국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은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부당성, 구국민중대회인 ‘보안회(保安會)’ 활동지지 등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며 국민의 애국사상 고취에 앞장섰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11월 일제가 한국정부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압하자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이란 사설을 발표해 직원들과 피체되고 신문사는 정간당하고 말았다.
이 같이 나라의 존망이 일촉즉발의 길에 들어서자, 《황성신문》의 주필 박은식은 국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글, 독립국가 완성을 위한 역량 축적의 방안을 제시하는 논설들을 발표해 구국의 길을 선도했다.
《황성신문》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제에 의해 신문제호를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바뀌어 9월 14일까지 운영되다가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1905)
박은식은 이 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다.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磚洞)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한국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해 창간되었다. 취재차 한국을 방문한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 베델이 양기탁을 만나 신문 창간을 협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보조와 애국지사들의 지원을 받은 이 신문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시켜 국난을 타개하고 국가를 구한다는 목표로 운영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가로 27㎝, 세로 40㎝ 크기의 타블로이드판 6면 중 국문이 2면, 영문이 4면 발행되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했다. 한글만 사용했던 국문판은 국한문 혼용이 되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는 제명을 썼다. 그러나 국한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1907년 5월 23일 『대한매일신문』이라는 제명의 순한글판을 새로 창간해, 국한문판 · 영문판 · 한글판 등 세 가지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애국논설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한편, 신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순한글판은 여성들의 개화와 자주의식 고취를 이끌었고, 한글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와 함께 일제의 침략상을 지적하고 친일 매국세력을 철저히 비판했다.
주필 박은식은 이 신문에 「혈죽기(血竹記)」 : 민영환(閔泳煥) 순국 후 그의 방에서 나온 혈죽의 구체적 모습과 순국의 의미, 유서 등에 대한 글. 「서우학회취지서(西友學會趣旨書)」 : 청년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중지(衆智)를 계발해 국권회복과 인권신장을 위해 서우학회를 설립했다는 취지서의 글. 「대한정신의 혈서(血書)」 : 길주수진학교(吉州修進學校) 교사 권병희(權炳熙)가 광무황제 탄생일 단지(斷指)한 피로 대한정신력(大韓精神力)이라 써 애국심을 나타 낸 사실을 평한 글. 등의 논설을 발표했다.
향강(香江)(1914)
박은식은 이 잡지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과 중국인이 공동으로 경영한 잡지 『향강』 은 홍콩에서 창간되었다. 박은식은 이 잡지의 편집주간이 되어 활동했다. 두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발한 언론활동을 수행했으나, 제4호에 원세개(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가 출판금지 당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시일보(國是日報)(1914)
박은식은 이 신문의 주간에 취임해 활동했다. 『국시일보』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었다. 박은식은 청나라 말기의 정치학자 강유위(康有爲)의 부탁으로 이 신문의 주간에 취임했다. 강유위는 『한국통사(韓國痛史)』 서문에 “필법이 사마천(史馬遷)의 정수를 얻었다”라고 박은식을 칭송한 학자였다. 둘 사이에 이 같은 친분을 가졌기에 부탁을 받아들여 주간이 되었으나 이 신문은 짧은 기간 발행되다 정간되고 말았다.
한족공보(韓族公報)(1917)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던 박은식은 1918년 6월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이 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이 신문은 러시아 연해주의 니코리스크에서 독립운동기관인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가 1917년 3월 31일 창간한 기관지다. 처음에는 『청구신보(靑丘新報)』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주간지였으나 초기에는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기일을 맞춰 간행되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2일 러시아 각지에서 76명의 한인대표들이 모여 자금문제와 체계적 간행 계획 등을 협의했다. 이후부터 순조롭게 발간되기 시작했다.
상하이에서 건너 온 박은식과 함께 조완구(趙琬九) · 윤해(尹海) · 남공선(南公善) 등이 가세해 집필과 편집진도 강화되었다. 명칭을 『한족공보』로 변경하고, 강화된 집필진은 항일 및 민족정신이 깃든 논설을 실어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그 시기 하와에서 발행되고 있던 『신한민보』에 ‘『청구신보』가 간행되었으니 구독하라’는 광고를 게재할 정도로 독자의 범위도 넓혔다. 이 신문은 1919년 말 폐간되었다.
신한청년(新韓靑年) 주간으로 활동(1920)
박은식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이 잡지의 주간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국제사회는 재편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김규식(金奎植) · 서병호(徐丙浩) · 여운형(呂運亨) 등은 이 기회를 조국 독립운동에 이용하고자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당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1918년 12월 ‘조선독립에 관한 진정서’라는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고, 1919년 1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외교활동을 펼쳤다.
신한청년당은 이 같은 활동상과 독립운동계의 움직임을 『신한청년』이라는 기관지를 1919년 12월 창간해 한인 및 국제사회에 전달했다. 박은식은 이 기관지의 주간에 선임되어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발표했다.
신한청년당은 간부들 사이의 이념적 차이와 일부가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하면서 1923년 6월 경 해체되었다.
사민보(四民報)(1921. 10)
박은식은 이 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다.
사민보는 중국 광동성(廣東省) 공교회장(孔敎會長) 임택풍(林澤豊)의 자금을 지원받아 박은식이 주도해 만든 항일언론 기관이었다. 16면의 일간지로 한중(韓中) 양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것과 함께 국제정세를 알리는 논설 및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박은식은 이 신문에 ‘백치(白痴)’라는 필명으로 논설을 쓰거나 외국 사상가의 훌륭한 글을 요약 번역해서 올렸다. 「민족생존권(民族生存權)」(하전박사〔河田博士〕의 글을 번역게재, 1921. 12. 17 〜 22), 「오호매국차관복유온양자호(嗚呼賣國借款復有醞釀者乎)」(1922. 1. 1, 1. 4), 「오호중국경락어보호계급의(嗚呼中國竟落於保護階級矣)」 등 수십 편의 글을 썼다.
독립신문(獨立新聞)(대한민국임시정부 간행)
박은식은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이 신문의 주필로 참여했다가 3년 후인 1924년 사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8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로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조계 늑로(勒路) 동익리(東益里)에서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 사장 겸 주필에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편집국장 주요한(朱耀翰), 영업국장 이영렬(李榮烈)이 취임했다.
창간 직후에는 4면을 주 2회 또는 3회 부정기적으로 발행했으나 9호부터는 한 주에 3회(화 · 목 · 토) 발행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특별한 기념일 또는 사건이 있으면 더 자주 발행하기도 했고, 경영난이 닥치면 주 1회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가로 23.4㎝, 세로 33.5㎝의 판형에 국한문 혼용을 썼다. 세 번의 제호 변경이 있는데, 창간호부터 21호까지는 ‘獨立’을, 22호(1919. 10. 25)부터 168호까지는 ‘獨立新聞’을, 169호(1924. 1. 1) 이후부터는 ‘독립신문’을 사용했다.
이 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만큼 일제의 포악함과 잔학성을 폭로하는 기사, 독립군 및 의열사들의 활동상 등을 주요 기사로 다뤘다. 그 밖에 일본정부의 움직임, 약소국 문제가 주제가 된 국제정세 등과 항일 시나 수필 같은 문학도 게재되었다. 이 같은 내용이 실린 『독립신문』은 상하이 한인사회에 뿐만 아니라 국내외 전 한민족에게 전달되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박은식은 『독립신문』에 ‘나의 사랑하는 청년제군(靑年諸君)에게’(1920. 6. 17), ‘적(敵)을 전승(戰勝)할 능력(能力)을 구(求)하라’(1920. 6. 27), ‘삼일절기념사(三一節紀念詞)’(1922. 3. 1), ‘적(敵)이 광화문(光化門)을 훼각(毁却)한다’(1923. 3. 7) 등 수많은 논설을 섰다. 특히 이 신문에는 임시대통령 박은식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떠나며 남긴 ‘고별사와 독립운동의 대방침’(1925. 10. 21자), 서거 시 남긴 유촉(遺囑)의 글(1925. 11. 11) 등이 실려 있다.
『독립신문』은 등록문화재 제50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