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

(사)임시정부대통령 백암 박은식선생 기념사업회

백암의 계몽·교육 및 학회활동


독립협회(獨立協會)가담해 문교부문 활동(1898)

박은식은 1898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문교부문에서 활동했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미국에 망명해 서구사회를 경험하고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주동이 되어 1896년 7월 2일 설립한 계몽단체였다. 1895년 12월 하순 귀국한 서재필은 이듬해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약 3개월 후 이 협회를 설립하였다. 협회의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자주독립이었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외형적으로 이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해 국민 계몽활동을 펼쳤다. 또한 종로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해 외세의 이권침탈을 반대하고, 정부에 민권의 신장을 요구하는 등의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독립협회는 개혁적인 내각을 수립하고 근대민주주의의 상징인 의회(議會) 설립까지 추진했으나 고종(高宗)의 명령에 의해 1898년 12월 해산하고 말았다.

독립협회는 이 같이 주권독립운동 · 자유민권운동 · 자강개혁운동 등을 지향하며 나간 단체였다. 따라서 이를 실천하기위해 여러 분과를 설치했다. 박은식은 이러한 독립협회에 가담해 자신의 주 전공인 문교부문에서 활동했다.

경학원(經學院)

박은식은 1900년 경학원의 강사로 초빙되어 경학을 강의했다.

경학원은 조선시대 최고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의 기능이 개화의 분위기속에서 부진해지자, 교육의 강화를 위해 1887년 그 내부에 부설한 기관이었다. 구한말 성균관은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자 우리 전통의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면서 근대화에 대처해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했다. 그 같은 취지에서 유학 이외 본국역사(本國歷史) · 만국역사(萬國歷史) · 만국지지(萬國地誌) · 산술 등을 학과목으로 선정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은식은 이러한 시기 경학원의 강사로 초빙되어 새로 개편된 성균관의 취지에 맞추어 경학을 강의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는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없애고 경학원이라는 이름만 남겨 유교의 제사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박은식은 1900년 이 학교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국민교육담당자를 양성하기위해 노력하였다.

개화의 물결속에 초등교육기관인 소학교(小學校)를 전국에 보급시킬 계획을 세운 조선정부는 교원양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1895년 4월 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2년제의 본과와 6개월의 속성과 등이 있었다. 본과는 20〜25세, 속성과는 22〜35세가 입학할 수 있었고, 정원은 본과 100명, 속성과 60명이었다. 수신 · 국어 · 한문 · 교육 · 역사 · 지리 · 수학 · 물리 · 박물 · 화학 · 습자 · 작문 ·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박은식은 이 같은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2세를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는데 옹 힘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 일제는 식민지교육을 위한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그리고 이 교육령에 의해 이 학교는 관립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사범과 또는 속성과로 개편되었다. 식민지시기를 거쳐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되었다.

서우학회(西友學會)(1906. 10 설립)

박은식은 1906년 신석하(申錫廈) · 김달하(金達河) · 김병도(金秉燾) · 김명준(金明濬) 등 재경 평안 · 황해도 출신 인사들과 이 학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함.

이 학회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와 전현직 무관그룹 등을 기반으로 1906년 10월 조직되었다. 참여자들의 성향은 개화자강파 노선의 신지식층이자 사회지도층이었다. 서울에 중앙회를 설치하고, 각 지방에는 지역방사무소와 지회를 두었다. 참여 회원은 1,000여명에 달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양성하기위해서는 근대교육 보급이 지름길이라 판단해 교육운동에 집중했다. 통상회(通常會) · 간친회(懇親會) · 친목회 · 운동회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신교육의 필요성을 적극 계몽했다.

서북학생친목회를 통해 청년학생들을 지도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토록하는 한편, 서우학교(西友學校)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서우학회는 1908년 1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가 되었다.

박은식은 이 학회의 설립을 알리는 「서우학회취지서(西友學會趣旨書)」를 직접 작성해 『대한매일신보』(1906. 10. 16일자)와 회지인 『서우(西友)』(1906. 12월, 창간호)에 게재했다.

서우(西友)(1906. 12. 1 창간)

박은식은 서우학회의 회지인 이 잡지의 주필이 되어 활동했다.

애국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의 회지인 이 잡지는 1906년 12월 1일 창간되어 1908년 1월 1일가지 통권 14호를 간행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서우학회의 총무였던 김명준(金明濬)이었다. 50쪽 안팎의 국판이었다.

매호 고정란으로 ‘애국정신담’과 ‘인물고’를 만들어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게재했다. 1908년 1월 서우학회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가 되자 이 회지도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로 변경되었다.

박은식은 이 회지에 ‘교육이 불흥(不興)이면 생존(生存)을 불득(不得)’(1906. 12. 창간호), ‘구습개량론(舊習改良論)’(1907. 1), ‘사범양성의 급무(師範養成의 急務)’(1907. 4), ‘인민의 생활상(生活上) 자립으로 국가가 자립을 성(成)’(1907. 7), ‘문약지폐(文弱之弊)는 필상기국(必喪其國)’(1907. 9) 등 교육의 필요성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발표했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박은식은 이 월보에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많은 논술을 발표했다.

대한자강회는 이준(李儁)이 결성했다가 해산된 헌정연구회를 계승해 1906년 3월 설립된 계몽단체였다. 장지연(張志淵) · 윤치호(尹致昊) 등이 주도했으며 백성의 자강(自强), 즉 실력양성을 주장했다.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는 1906년 7월 31일 창간되었다가 통건 13호를 내고 1907년 7월 25일 폐간되었다. 국내외의 학문과 정세에 대한 사실, 연설문 및 소설 등을 실어 국민의 지식계발을 도모했다.

박은식은 이 월보에 ‘자강능부(自强能否)이 문답(問答)’(1906. 10), ‘사포왜동포(謝布哇同胞)’(1906. 11), ‘만보역재후식(滿報譯載後識)’(1906. 12) 등의 글을 실었다.

서북학회(西北學會)(1908. 1 설립)

박은식은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의 통합을 주도해 1908년 이 학회를 탄생시키고,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이 학회는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1906년 설립한 서우학회와 같은 해 이준(李儁) · 오상규(吳相奎) · 이동휘(李東輝) 등 함경도 출신의 애국지사들이 설립한 한북흥학회를 1908년 통합시켜 설립한 것이다. 학회 설립과 함께 박은식을 비롯한 주도자들은 대규모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회관을 건립하고 서북회관이라 명명했다. 이 회관은 학회의 사무실로 쓰이며, 부설학교인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의 교사로도 활용되었다.

이 학회는 서우나 한북흥학회 시기와 마찬가지로 국민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즉 외세에 흔들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방략을 실력양성에 두고 그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를 위해 『서북학회월보』를 발행해 국민의 애국심을 고조시키는 논설을 발표하고, 서북협성학교에 사범과를 두어 애국인재를 교육시킬 교사 양성에 주력했다.

세력을 확장해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친일정치인들을 몰아 내기위해 1909년 일시 대한협회(大韓協會) 및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과정에서 친일단체와의 정체성이 일치시킬 수 없어 결렬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체되었다.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1908)

박은식은 서북학회 회장을 수행하며 기관지인 이 학회지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논설을 매호 발표해 국민을 계도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6월 1일 창간되었다.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1908년 서북학회를 설립하면서 그 학회지로 탄생한 것이다. 서우학회 회지인 『서우』의 후신이라 할 수 있으며, 50쪽 내외의 국판으로 간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달하(金達河)였다.

구국을 위한 실력양성론이 절실함을 깨달은 서북학회 지도층의 의지에 따른 이 학회지는 교육과 계몽사상을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박은식이 1909년 3월 『월보』 제1권 10호에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은 전통적인 유교의 근대화 및 한국화를 선도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유교를 공자(孔子)의 대동주의(大同主義)와 맹자(孟子)의 민위중지설(民爲重之說)에 의거해 민중적 유교로 다지고,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유교이자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한 실천적 유교로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 밖에 박은식은 이 학회지에 ‘노동동포의 야학(夜學)’(1908. 2), ‘인(人)의 사업은 경쟁으로 유(由)『야 발달』’(1908. 3), ‘독고구려영락대왕묘비등본(讀高句麗永樂大王墓碑謄本)’(1909. 2), ‘세계장래(世界將來)에 공중생활(空中生活)과 공중전쟁(空中戰爭)’(1909. 8) 등 교육의 중요성과 조국의 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사항 등을 논술로 발표했다.

이 학회지는 1910년 1월 1일 통권 1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1908년 설립)

이종호(李鍾浩)에 이어 교장에 취임한 박은식은 교육을 통한 전국민 실력 양성에 온 열정을 쏟았다.

1908년 1월 기존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탄생시켰다. 그에 따라 서우학회 운영의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와 한북흥학회 운영의 한북의숙(漢北義塾)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학교다. 교사(校舍)는 서북학회가 건축한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건물을 사용하였다.

설립 초기 교장은 이종호였으나, 1909년 박은식이 교장에 취임했다. 교장을 맡은 박은식은 본격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전국에 지교(支校)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09년 말까지 전국에 63개의 서북협성학교 지교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교에서는 본교와 마찬가지로 구국을 바탕에 둔 실역양성을 위한 신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해 서북학회가 강제해체되면서 1910년 10월 1일부터 교명을 오성학교(五星學校)로 고쳐 부르다가 1918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폐교조치 당했다.

광문회(光文會)(1910년 설립)

박은식은 최남선(崔南善) · 현채(玄采) 등과 한국 고전간행단체인 광문회를 설립해 민족전통 계승에 노력했다.

1910년 8월 한국을 병탄(倂呑)한 일제는 한국의 진귀한 서적과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이에 박은식은 뜻있는 지식인들인 최남선 · 현채 등과 1910년 12월 초 광문회를 발족하고 신문관 2층을 사무실로 정했다. 이 회의 사업목적은 일제가 한국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거나 반출해 가기 전에 귀중한 문서를 수집해 편찬하고 개간한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전통문화를 널리 보급하고 지키기 위해 만든 잔체였던 것이다.

시박 당시 180여 종의 고전을 중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자금부족과 일제의 압박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 『열하일기(熱河日記)』,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20종만 간행하였다.

박은식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이 같은 노력은 우리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한 일제의 탄압에 대항해 한민족의 문화를 기필코 계승하고 지키겠다는 항일운동이었던 것이다.

박달학원(博達學院)(1913. 7. 6 설립)

박은식이 신규식(申圭植) · 이찬영(李瓚榮) 등과 중국 상하이(上海) 교민 청소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13년 7월 6일 프랑스조계에 설립했다.

이 학교는 장차 독립운동에 앞장 설 후진 양성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박은식을 비롯한 신규식 · 이찬영(李瓚榮) · 김용호(金容浩) · 임상순(任相淳) 등이 협력하여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이들 민족운동가들은 박달학원을 졸업한 한인학생들을 장차 중국 또는 구미의 상급학교에 유학시킬 계획도 세웠다.

외국 유학을 목표로 하였기에 영어 · 중국어 · 지리 · 역사 · 수학 등을 교과목으로 정해 가르쳤다. 강사는 박은식을 비롯해 신채호(申采浩) · 홍명희(洪命憙) · 문일평(文一平) · 조소앙(趙素昻) 등 독립운동계 지도자들과 중국인 농죽(農竹). 미국계 화교(華僑)인 모대위(毛大衛) 등이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후에 독립운동계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로1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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